2020휴먼스오브금천-박양희 살구여성회 활동가 인터뷰
글쓴이 : 마을관리자 작성일 :20-12-09 12:29 조회 : 480회 댓글 : 0건본문
내 가족의 식탁처럼 이웃의 식탁을 차리다
박양희 회장, 13년간 밥 짓는 냄새 끊이지 않았던 열정의 봉사
살구여성회의 대표 사업이라 할 수 있는 따뜻한 밥집은 1997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식탁을 차린다. 정해진 시간이면 생계가 힘겨운 어르신들이 따뜻한 밥집에 찾아와 한 끼를 드신다. 그 한 끼는 어려운 이들에게 감동의 밥 한술이자 끈을 놓지 않은 희망이고, 살구여성회에게는 오늘도 이웃과 더불어 살았다는 보람찬 시간의 증명이다. 이 따뜻한 밥집을 긴 세월 무너짐 없이 일궈온 데 대해 박양희 살구여성회 회장은 들려줄 이야기가 아주 많다.
시흥에서 독산으로, 밥집의 이사
박양희 회장님은 따뜻한 밥집이 시흥에 위치할 때부터 지금까지 식탁을 책임져오셨습니다. 그 시작부터 차근차근 들어보고 싶습니다.
살구여성회에서 1997년 경로 무료급식소인 ‘따뜻한 밥집’을 열었고, 저는 2007년부터 함께 해서 13년째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 ‘따뜻한 밥집’은 시흥에 있었고, 10년쯤 후에 독산3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어떤 계기로 시흥에서 독산동으로 따뜻한 밥집을 옮기게 됐나요?
당시 시흥에는 무료급식소가 11곳이나 있었습니다. 살구여성회의 따뜻한 밥집은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마다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식사하러 오시는 분들이 수첩에 요일별로 밥을 주는 기관을 메모하고, 그 요일에 맞춰 무료급식을 드시러 다니더라고요. 그만큼 기초적인 생계가 어려운 분이 많았다는 거죠. 그런 정황을 알아가면서 당시 금천구 내에서도 낙후된 지역이었던 독산동에 무료급식소를 열자고 의견을 모아 2009년 이사를 했습니다.
따뜻한 밥집을 독산동으로 옮기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여러 가지 문제로 막막했죠. 당시 이사를 앞두고 독산동의 집마다 방문하며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무료급식소가 생긴다면 식사를 일주일에 몇 번, 어떤 형태로 받고 싶은지 여쭙는 조사였는데, 조사 중에 만난 주민 한 분이 “여러 번 조사만 하고 급식을 진행한 적이 없었다.”라며 호통을 치시더라고요. 그때 이곳 주민들에겐 생계의 곤란함이나 상처가 꽤 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사를 마치고 즉시 무료급식소를 열었습니다.
그렇게 독산동에서 따뜻한 밥집을 열 때 주민센터에 무료급식이 꼭 필요한 40~50분의 명단을 받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명단에 계신 분들이 잘 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김주숙 교수님을 비롯해 활동가들이 동네를 다니면서 파지 줍는 분들이나 홀로 계시는 어르신들께 식사하러 오시라고 초대를 했는데 나중에는 100명 넘게 오셨어요. 주민센터가 파악한 인원보다 도움이 필요한 주민이 훨씬 많았던 거죠.
당시 어르신들 외에 아이들의 식사도 챙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독산동 따뜻한 밥집이 남문시장 근처였거든요. 어르신들 식사를 챙기다 보니 근처 놀이터에서 배고픈 상태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어요. 그래서 어르신들이 식사를 끝내시면 아이들을 불러와 밥을 먹였습니다. 그렇게 살구지역아동센터가 출발하게 되었죠.
마음까지 따뜻하게 데워주는 건강한 식단
많은 인원의 식사를 챙긴 따뜻한 밥집인데요. 운영이 쉽지 않았을 텐데 1997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동안 재정의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구청에서 보조금이 나오긴 하나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모든 비용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공간 임대료, 각종 요금 등 비용은 살구여성회가 직접 부담해야 합니다. 솔직히 그런 재정적 어려움이 너무 버거워서 문을 닫아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따뜻한 밥집은 구청 보조금이 없을 때도 운영하던 사업이거든요. 그런데 보조금이 나오는 상황에서 문을 닫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좀 더 열심히 해보자며 꿋꿋하게 버티며 지금까지 오게 된 겁니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후원자님들의 영향도 있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죠. 살구여성회가 어려운 고비를 넘겨온 것은 같은 지역에 계시는 후원자님들 덕분입니다. 그분들이 계셔서 어르신들의 삶에서 빈곤을 조금이나마 걷어낼 수 있었고, 배고픈 아이들의 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었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모여서 따뜻한 밥집이 운영됐기에 저는 밥 한 끼가 단순한 밥의 의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밥집의 메뉴 선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궁금합니다.
이왕이면 건강한 식사를 위해 영양사 선생님을 고용하고 싶었는데 형편상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영양사가 짠 식단처럼 5대 영양소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하면 잘 짜인 식단이 많이 공개돼 있어서 참고하기도 합니다. 또 모든 식단은 정성 들여 만든 육수를 기본으로 만들기 때문에 건강하고 맛이 좋다는 평가가 늘 자자하답니다.
따뜻한 밥집이 요즘에는 코로나 사태로 운영이 조금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따뜻한 밥집에 직접 오셔서 식사하실 순 없지만,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3일 치의 식사를 포장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밥은 부피가 꽤 있는 편이라 식사 오시는 어르신들께 각자 밥을 담아갈 밥통 하나씩 준비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 한 분도 빠지지 않고 도시락통을 준비해 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3일에 한 번씩 얼굴을 뵙는데 다행히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13년간 살구여성회에 몸담고 계시고, 또 지금은 회장직을 맡고 계신데요.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들어보고 싶습니다.
살구여성회 활동가 중 박성숙 선생님 아들 돌잔치가 참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2007년이었는데, 아들 돌잔치를 따뜻한 밥집에서 열었습니다. 각자 집에서 떡이나 잡채 등 음식을 준비해 와서 어르신들과 나눠 먹으며 잔치를 치른 거지요.
그때 박성숙 선생님이 돌잔치를 치르면서 어르신들 앞에서 다짐한 게 몇 가지 있습니다. “아이를 절대 남과 비교하지 않겠습니다. 매일 책을 읽어주겠습니다. 매일 하나씩 칭찬해주겠습니다.”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멋진 엄마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 함께했던 분이 크게 손뼉 치며 축하해줬던 광경이 여전히 눈에 선합니다.
정말 뜻깊은 돌잔치였네요. 그밖에도 박양희 회장님이 살구여성회 활동을 하며 보람을 느낀 사례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후원자님이 사정상 후원을 못 하실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군가 후원을 중단하면 새로 후원자님이 꼭 생기더라고요. 또 따뜻한 밥집에 식사하러 오는 어르신 중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간혹 지폐를 손에 쥐여주고 가실 때도 있는데, 그 마음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값진 후원이죠. 그런 경험이 쌓일 때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보람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박양희 회장님께 살구여성회가 어떤 의미인지 여쭤볼게요.
저는 가정에서 엄마이자 아내 그리고 세 아이의 할머니입니다. 제가 집에서 밥을 짓고 빨래하고 가족을 돌보는 일을 꼭 제가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반드시 ‘누군가’ 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요.
살구여성회 활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르신들의 식사를 챙기고, 소외된 아이들을 돌보고, 배움의 길이 막힌 이들의 앞을 틔워주는 일을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겠죠. 그 역할은 세상에 꼭 필요하고, 살구여성회가 하고 있음에 보람을 느낍니다. 저에게 살구여성회는 이웃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 입니다.
어려운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살구여성회를 힘껏 이끌어온 박양희 회장. 따뜻한 밥집에 밥 짓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던 건 내 가족의 식탁을 차리듯 13년간 이웃의 식탁을 차린 박양희 회장의 두둑한 책임감 덕분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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