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휴먼스오브금천-김주숙(가산동)살구여성회 활동가 인터뷰
글쓴이 : 마을관리자 작성일 :20-12-07 16:50 조회 : 501회 댓글 : 0건본문
농촌사회연구자가 도시사회를 연구하다
살구여성회의 소소한 얘기가 듣고 싶어 왔어요
살구여성회가 도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였는데, 나는 원래 도시 활동의 전문가가 아니었어요. 내가 1959년에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사회가 농촌사회였어요. 대학마다 농촌계몽 서클이 있었어요.
이대 사회학과 학과장이면서 지도교수가 고황경 박사였는데, ‘내가 남산농촌사회연구회란 서클에 관련이 되어 있다. 와라’ 그래요. 남녀 혼성 서울 시내 대학생들 종합 서클이에요. 지금 남대문교회라고 서울역 앞에 큰 교회가 있는데, 신축하느라 지하만 있을 때, 교회 한쪽을 빌려서 서클 활동을 한 거예요. 토요일에는 거기서 공부도 하고 토론도 했어요. 일요일에는 광나루 밖에 수재민을 위한 모범주택을 짓는 데가 있었는데, 거기 가서 흙벽돌로 농촌형 주택과 도시형 주택도 짓고 그랬어요.
1학년 1학기 초에 이대 사회학과 1학년 30여 명이 거기 남산농촌사회연구회에 몰려갔다가 나중에 나하고 다른 친구하고 둘만 남았어요. 그렇게 활동하다가 남산농촌사회연구회의 마지막 회장이 나였어요. 60년대 중반쯤에도 종합 농촌 서클이 있기도 했는데, 다 흐지부지됐어요. 박정희 정권 들어오면서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하잖아요.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들어서 공업화, 산업화 사회가 되니까 노동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농촌문제는 이제 밀려났어요. 그래도 전 계속했어요. 일생 동안 농촌사회연구를 해온 셈이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사회에 관한 일을 하셨나요?
1963년 12월에 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 1월 4일부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에 출근했어요. 당시 의과대학에서 인구연구를 하니까 사회학 연구자가 필요했어요. 조사연구 하고 조사자료 처리하는 사람도 있어야 했지요. 당시는 한국의 인구문제가 심각하니까 미국인구협회에서 한국 인구연구를 위해 돈을 투자하던 시기에요. 박정희 시대에 가족계획 운동을 열심히 했잖아요. 산업화는 결국 먹는 입을 줄여서 성공한 거라고도 볼 수 있죠.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인구 및 가족계획 연구에 참여하던 당시, 어느 날
캠퍼스 안에서 우연히 이효재 교수님을 만났어요. 서울여대로 옮기셨던 당신이 다시 이화여대에 오셨고, 이대에서 연구소를 만들려고 보니까 일 시킬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대학원을 마쳤고 연대 연구소에서 일도 하고 있으니까 ‘잘 됐다. 너, 와라!’ 그러셨죠.
당시 대학원 마치고 연세대에서 연구원을 하면, 대학에서 무급 전임강사 발령을 내고 월급은 미국 인구기금으로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일단 전임은 전임인 거였죠. 근데 그 가능성을 포기하고 이화대학으로 옮겼어요. 훌륭하신 모교의 교수님이 오라니까 무조건 옮긴 거죠.
1971년 5월에 이화대학교 문리대학 연구소로 옮겨 가니까 월급이 반 토막이에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왜냐면 곧바로 가을 학기에 시간 강의도 하게 됐거든요. 그때 내가 서른한 살이었어요.
이효재 선생님과 어떤 연구소를 하신 건가요?
연구소 이름이 여성자원개발연구소였어요. 당시 연구소 이름이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여성을 자원으로 본 거니까요. 내가 거기서 한 첫 번째 프로젝트가 도시지역사회의 문제해결을 위한 주부들의 조직화였어요. 서울의 마포 시범아파트와 화곡동 주택단지를 연구지역으로 정했어요. 양쪽 지역 문제를 사전조사한 다음에 그 자료를 바탕으로 각각 주부대학을 열었어요. 강의 중에 지역조사를 통해 확인한 두 지역의 문제를 설명해주고, 해결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과 토론을 했지요.
마포 시범아파트는 한강 변에 있었고, 화곡동은 대단지로 택지가 개발되던 시절인데, 여유 있고 배웠다는 사람들이 화곡동에 많이 입주했어요. 이화대학연구소에서 연구를 한다니까 화곡동 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동장님 모두 협조를 해주셨어요. 교육을 유치원에서 하다 보니 유치원과 학교 자모들도 강좌에 많이 참여했고요. 그때 참 의미도 크고 재미있게 일을 했죠.
화곡동 개발 초기에 집이 뜨문뜨문 있으니까 소비재 구입이 문제였어요. 갑자기 수세식 변소로 바뀌어서 화장지를 많이 사야 하는데 슈퍼가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공동구매에 관한 원리, 소비자 협동조합의 원리를 내가 강의하고 공동구매도 했어요. 그게 소비자 협동조합 같은 거였지요.
연구담당자였던 나는 <소비자 보호와 구매클럽>이라는 책자도 쓰고 그러면서 2년 동안 그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연구소에서 그 프로젝트하면서 사회학과 강의도 했으니까 이화대학에 진입을 한 거였죠.
일하며 배우며
살구여성회를 할 수 있게 한 경험이었군요. 그럼 어떻게 금천구에서 활동하시게 되셨어요?
금천구에 살게 된 건 사연이 있어요. ‘68년 2월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 주 토요일에 결혼했어요. 당시 우리가 30,000원에 2,500원짜리 사글세를 들었는데, 이웃에 사는 남편 친구가 사건에 걸려서 잡혀 들어가니까 집주인이 우리 보고 나가 달래요. 임신은 했는데 갈 곳이 없어서 동생들하고 합쳐서 모래네를 전전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친한 친구가 시민아파트로 이사 왔다고 오래요. 가보니까 방 두 개에 수세식 변소도 있고, 산꼭대기인데도 수도가 콸콸 나와요. 와, 천국이야, 천국.
그래서 거기에 힘들게 들어갔어요. 실 평수가 8.5평인데, 서울 시내에 대한민국 역사상 관청이 지은 가장 작은 평수 아파트예요. 사실 그때 북가좌동에 방 2개를 전세로 얻어 살고 있었어요. 택시도 못 들어가는 곳이라 둘째를 낳아 안고 들어가다 아기가 비를 맞아 입원까지 시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집 부인이 애를 낳을 때가 되니까 나가래요. 딸만 하나 있는 집인데, 세 들어 사는 내가 아들을 낳았잖아요. 이게 또 문제가 된대요.
결국, 그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오면서 이제는 절대로 셋집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연희동 시민아파트로 간 거예요. 거기서 약 7년 살다가 다시 결사적으로 노력해서 그다음에는 18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했어요.
연희동에서 어떻게 독산동으로 오시게 됐나요?
구로노동자회 덕분에 그렇게 됐어요. 한번은 운동권들 모임에 갔다가 정양숙 씨를 만났어요. 어디 사느냐고 해서 시민아파트 산다고 하니까 그 좁은 집에서 어떻게 일곱 식구가 살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주택조합이 있으니 들라고 권했어요. 조지송, 인명진 목사 이런 사람들이 미국 교회재단의 외원을 받아 노동자들을 위한 공동주택을 지을 거래요. 시흥고개에 땅 1400평을 사서 50평 단위로 노동자 주택을 지을 거니까 자기네와 같이 하나를 분양받재요. 돈이 없다니까 잔금 낼 돈을 우선 빌려준대요. 그렇게 주택조합을 들어놓았어요.
그런데 당시 노동자들이 집값을 다 낼 수가 없으니 외원을 얻어서 짓고 장기 상환 방식으로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한국의 어디 관청이든지 은행이 보증을 서줘야 한다는데, 대한민국 어느 은행도 보증을 안 서주는 거예요. 신협도요. 공동주택 안에 유치원, 식당 설계까지 다 나왔는데, 결국 못 짓고 땅을 분할 했어요.
분할 할 때 목 좋고 시장 가까운 데는 남들이 다 차지하고, 맨 끝에 체비지가 우리 몫이 되었어요. 조합원들은 차례로 집을 짓는데, 남편이 감옥에 있으니 정양숙 씨와 우리는 집 지을 엄두도 못 내죠. 여러 해가 지나 남편과 찾아가 보니 동네가 되었더라고요. 그 사이 아이들도 자라서 18평 아파트는 터질 것 같았고, 그래서 공동 분할 받았던 분에서 나머지 땅을 사서 남편이 아마추어로 우리 집을 지었어요. 그곳이 독산2동 1070-20번지에요
유학은 어떻게 가시게 되었나요?
석사를 하고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시간 강사를 했는데, 세월이 가다 보니까 외국 가서 박사를 안 하면 대학교수 되기가 틀린 거예요. 그런데 이효재 선생님이 그간 고생을 했으니 외국에 가서 좀 쉬다 오라고 주선해주셔서 덴마크에 갔어요. 오르후스에 있다가 코펜하겐을 갔다가 동양연구소에서 코펜하겐대학교 가족사회학 교수를 알게 됐어요. 그분의 요청으로 오르후스에서 코펜하겐으로 옮긴 뒤, 스터디 투어로 스웨덴을 갔어요. 웁살라 대학에서 사회학 교수를 만나고, 그 교수 추천으로 웁살라대학 사회학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됐죠.
처음엔 코펜하겐에 머물면서 다니다가 장학금을 연장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스웨덴 웁살라대학교 박사과정 공부를 시작했고, 몇 달 후 웁살라로 갔지요. 종일토록 도서관에서 공부만 했어요. 애들 넷을 두고 갔으니 열심히 해야죠. 애들한테 편지도 쓰고, 그림도 그려 보내고 그러는데,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안 와요. 알아보니 이미 정보부에 잡혀갔어요. 그걸 알고 바로 돌아왔죠. 남편이 7년 형을 선고받더라고요. 다시 스웨덴에 못 갔죠. 박사과정 3분의 2를 마치고 유학은 중단됐어요.
자녀분이 넷인데, 특별한 교육철학이나 비결이 있나요?
나는 아이들에겐 공부를 가르치는 거보다 그냥 많이, 잘 먹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애들은 우선 충분히 먹여야 해요. 그게 내가 우리 집에서 자식 넷을 기르는 원칙이에요. 배부르게 먹이고 집안에 읽을거리만 있으면 웬만하면 문제가 안 일어나요. 잘 먹여 보세요. 애들이 훤해져요. 잘 먹으면 기분 좋아지고 건강하죠. 어렵게 살면서도 먹이는 건 잘 먹이려고 했어요.
결혼하신 걸 후회하지 않으셨어요?
나는요, 내 인생을 내가 살아요, 남편 때문에 살지 않아요. 자식 때문에 살지도 않고. 그렇지만 가족 누구도 희생시키면 안 된다는 원칙은 있어요. 저는 스칸디나비아 명문인 웁살라대학교 박사 공부를 하다가 남편이 감옥 가는 바람에 못 끝냈지만, 그래도 나중에 대학교수가 됐잖아요?
우리 남편이 평생 돈을 잘 못 벌어요. 농민운동가가 뭔 돈을 벌겠어요. 국회의원 생활을 할 때도 나는 남편의 세비가 얼마인지도 몰랐어요. 남편 수입으로 살아본 건 내가 외국에서 공부하던 때가 다예요.
돈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고. 다행히 빚은 안 져요. 그리고 탈이 없는 사람이에요. 남편은 말도 없고 탈도 없어요. 잡혀가고 고문받고 큰 탈을 내서 그렇지 아무거나 먹고, 그냥 자기 일 방해만 안 하면 되는 사람이에요. 입이 없어요.
그렇게 돌아오셔서 한신대 교수가 되신 건가요?
한신대를 금방 갔겠습니까? 오전에 재판정에 갔다가 오후에 시간 강의도 하고 그럴 때, 전북대에 전임자리가 나왔어요. 그래서 서류 통과가 됐는데 총장 선에서 안 된대요. 6개월 동안 이유를 대라고 청와대를 들볶아도 해결이 안 돼서 시간 강의도 그만두고 있었는데, 남편이 ’82년 8.15에 갑자기 석방됐어요. 그다음 날인가? 한 후배가 강의를 해보라고 하면서 한신대를 추천했어요. 한 학기 강의한 후 교수채용이 있기에 서류를 냈더니 채용됐어요. 그 당시 한신대학에 나 같은 교수가 여럿 있었어요. 한신대학 강의를 한 학기 한 후 ‘여기 전임 좀 합시다’ 내가 그랬어요. 신학대학에서 일반대학이 되면서 사회사업학과를 학생을 모집했는데, 당시 전임교수가 없더군요. 후에 사회복지학과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해보니까 재미있어요. 옛날 이화여자대학에서 했었던 지역사회 프로젝트가 사회복지의 지역사회 조직 사례잖아요.
사회복지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한신대 교수를 하면서 금천구에서 살구여성회를 시작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나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나의 정체성은 확고해요. 사회복지학과 교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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