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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사람들

2019 휴먼스오브금천. 최석희

글쓴이 : 마을관리자 작성일 :19-11-14 13:40 조회 : 621회 댓글 :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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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중요한 거는

민간의 자율성이라고 생각해요

행정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너무 달라요

행정은 아주 단기적이고 속도가 너무 빨라요

그래서 되게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들도 많거든요

시민사회라는 영향에 자율성과 독자성이 중요하고

그런 면에서는 여러 단체나 기관들이

그걸 어떻게 마련할까에 관심이 있구요

사실은 단체 하나하나 보면 몇 명 안 되고

되게 힘들게 진행 되는 게 있거든요

서로 상생 융합을 하는 거

예를 들면 자기 것만 강조하지 말고

지역사회를 위해서 내놓기도 하고

문을 열기도 하고 그런 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잖아요

사람이 하는 일인데 너무 누구 때문에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보다는 서로 배려하고

부족 하더라도 밀어주는

이런 문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Q. 본인이 하시고 있는 마을활동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는 지역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네트워크 활동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게 중심이고 그것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그동안에는 주로 예전에는 어린이날 공동행사를 하는 것을 시작해서 금천 교육 네트워크로 확산되는 과정이 있었고, 그러면서 주로 금천 교육 네트워크를 발전적으로 하고 마을인 교육을 만들고 어떻게 하면 잘해볼까 하는데 주로 관심이 있었고요. 이걸 중심으로 하면서 다양한 서로 도와주는 그런 활동을 했죠. 다른 조합의 조합원이 된다던가, 도시농업 네트워크나 건강한 농부나 이런데 조합원이기도 하고 그다음에 지역의 단체들하고 같이 금천 햇빛발전 협동조합이란 걸 만들어서 가급적이면 금천구에 태양관 발전소를 학교 옥상에 짓는 거 이런 걸 주로 하고 있죠.

 

Q. 자신만의 일에 대한 철학이 있으신가요?

A. 철학이야... 예전에 기본적으로 드는 생각은 금천구에 구로 공단이 있잖아요. 지금은 디지털 산업단지로 바뀌었는데 거기에서 많은 노동자와 기업이 있었는데 노동조합 운동이 되게 활성화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 현장, 일터에서는 노동조합을 통해서 민주화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증진 시키고 이런 거라고 하면 우리가 살고있는 지역에서 그런 마음으로 지역을 민주화하고 그 속에서 재밌게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게 처음의 생각이었고, 지금은 아들이나 자식들이 우리 동네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다. 제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Q. 그동안 하신 일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A. 마을인 교육이라는 사단법인을 출범시킨 일, 우여곡절 끝에 마을인 교육이 마을공동체로서 위탁받은 일, 독산고등학교에 50kw 태양광 발전소를 올렸을 때 이럴 때가 기억이 남았죠.

 

Q. 마을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A. 아쉬운 게 하나 있어요. 지금 드문드문 일이 진행되는 건 있는데, 독산동이나 가산동 골목에 가면은 많은 봉제 회사들이 있고, 현대 지식산업센터 외형으로 보면 되게 글로벌 하고 현대적인 거 같지만 그 안에는 제가 얼추 보니까 30%는 봉제 회사들이에요. 예전에 구로공단 시절에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을 주로 했던 데라 섬유 의류회사가 되게 많았거든요. 그것이 90년대 거치면서 되게 힘들어지는 과정에서 그 업체들이 공단에서 지역으로 밀려온 업체들인데 그 섬유 분야가 현재 금천구 산업경제에 20% 정도는 차지 할거에요. 안타까운 일은 거기서 일하시는 미싱사 분들은 제 또래가 많거든요. 50대에서 60대로 가는 혹은 60대이거나 향후 10년 이후에 그 봉제 산업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생각할 때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의 나이가 더 들 거고 그분들이 그 노동을 이어가기 힘들 건데, 문제는 그 산업을 이어서 할 사람이 없는 거죠. 이게 그 임금이 박해요. 옛날에는 노동 활동할 때는 그나마 올랐을 텐데 이제는 소 사장대로 작아지면서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도급제니 이런 걸 하면서 일당이 다른 업종에 비해 많이 받아야 하는데 예술이고 전문가들인데, 처우가 좋지 않고 그게 제일 좋지 않은 점이겠죠.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그런 거에 일을 안 하는데 그것이 제일 안타까운 문제고 국가적으로 지자체에서 섬유 산업에 대해서 뭔가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소상공인회 에서 몇몇 지원사업들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 잘 되는 거 같지도 않고 봉제문화에 대해서 처우개선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게 정말 이탈리아 같은데 보면 되게 비싼 가격에 수제를 팔잖아요. 그런 것처럼 되게 고급 노동이고 4차 산업혁명이 되든 어쩌든 사람들이 계속 옷을 입을 거니까 되게 미래지향적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아쉽죠. 이게 금천구 경제의 20%인데 그게 되게 아쉽죠. 봉제 문화센터나 이런 거라도 생겨서 그쪽 분야에 대해 활성화도 시키고 사람들에게도 이게 좋은 거구나 알려지고 그랬으면 좋겠네요.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나요?

A. 추진하고 싶은 건 많은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봉제문화와 관련된 것도 있고 또 하나는 역사에요. 우리가 구로구에서 분리된 게 95년도니까 청년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금천구에 이런 역사는 사실은 어디서 떨어져 나온 구로구에서 떨어져 나온 게 다가 아니거든요. 이전에 있었던 역사가 되게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구청이나 지역사회에서 우리 동네 역사에 대해서 많이 관심이 없어요. 그게 좀 아쉽고, 동네에서 금천구 역사 이것을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 갖게 할까, 이게 관심사고 두 번째로는 우리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구로공단이라는 산업화, 경제민주화, 노동운동 이게 우리 동네의 큰 키워드인데 이게 갑자기 구로공단이 있으면서 나온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지역에 몇몇 흐르는 전통이 있다 라는 생각이 들고 그 기원이야 저도 잘 몰랐는데 예전에 금천구 향토문화제를 보니까 거기에 시흥 농민봉기라는 게 있었어요. 그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맨 처음에는 그게 맨날 전봉준 녹두장군처럼 있었나 보다 싶었는데, 사실은 갑오개혁 이후에 농민들이 봉기를 한거 거든요. 시흥군에서 탐관오리들에 대해서 저항하는 그런 게 있었고, 1904년도에도 농민봉기가 있었어요. 저는 그게 되게 중요한 기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가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다른 열강들을 몰아내고 자기들이 조선에서 유일 패권을 누리는 이런 시기여서 그때가 아마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이렇게 할 때였어요. 지금도 잘 아시겠지만 금천구청역이 있는데 그게 옛날에는 시흥역이었고 그게 1904년도에 만들어지는 과정이 있었고 이 지역에 사시는 분들이 그게 일제가 토지를 강탈하거나 강제로 역부를 모집해서 하거나 이런 거로 아주 싼 가격에 강행해서 폭력적으로 진행된 그런 과정이 있었고, 시흥군 농민이 그때 928일 날인가 한내천 이라는 다리 지금은 안양천 어디 부근쯤 되겠죠. 거기 8천 명이 모여서 추수기에 무슨 역부를 모집하냐, 이래서 항의하는 모임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시흥 군수를 만나서 확인해보자 해서 군청에 쳐들어갔어요. 박우연 이었나 군수였는데 농민들이 군청에 갔더니만 그들이 겁에 질렸겠죠. 수 천명이 몰려왔으니까. 그때 우리가 일제로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이 지배하고 있을 때거든요. 그 군청에 일본군 무사들이 있었고 무사들이 농민들에게 칼을 휘둘렀죠. 그래 가지고 몇 명이 다치고 그래서 농민들이 분개 해서 그때 뭐가 있겠어요. 돌이나 쇠스랑이나 이런 거겠죠. 거기서 저항을 하면서 기록에 의하면 군수하고 군수 아들, 일본인 무사 두 명을 죽였어요. 되게 센세이션한 사건이었고 그것이 우리나라 근대 노동운동의 효시? 가령 몇 군데가 예를 들면 산업노동, 부두노동자,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는데 그즈음에 시흥 농민들의 투쟁이 그런 정도로 되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거예요. 그게 사실은 향토문화제에 있거든요. 금천구 향토문화제에 있는데 사람들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옛날에 농민봉기가 있었나 보지, 이 정도로 지나가는 건데 그런 게 있어요. 그때 중심인물이 성우경이라는 1차 농민봉기도 성우경이 주도했고, 2차 농민봉기도 성우경 선생님이 주도했는데 그 자세한 기록도 더 중요할 텐데 그런 내용이라던가 역사적으로 되게 중요한 거고 그런 게 신문이나 이런데 나와 있죠. 옛날 신문에 나와 있는 것들을 추려서 구로구에서 분구할 때 나름 금천구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둔 거니까 그런 면에서, 그런 역사적인 사료들을 정리하고 그걸 우리 아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표지석이라도 하나 만들어 둬야 할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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