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휴먼스오브금천- 최현남 살구여성회 활동가 인터뷰
글쓴이 : 마을관리자 작성일 :20-12-09 11:53 조회 : 440회 댓글 : 0건본문
우리도 학교가 있다
최현남
최현남은 오지랖이 자기 팔자라고 한다.
돈이 없는 것도 자신의 팔자라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제 배짱대로 살고 있다면,
그게 바로 상팔자 아닌가?
살구여성교실에서 살구평생학교가 되기까지
살구여성회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제가 98년에 금천구 작은 교회에 목회자로 오게 됐어요. 민중 목회자교육에서 김주숙 교수님 강의를 듣게 됐어요. 그때 인연으로 여러 도움도 받고 살구여성회회원이 되고, 한문강사도 하게 됐어요. 그러다 살구여성회 이사, 공동대표, 부회장도 했다가 지금은 살구평생학교 교장을 맡고 있어요.
살구평생학교는 어떤 곳인가요?
초등학력 인정과정과 성인문해교육을 하고 있어요. 살구여성회는 설립초기부터 여성, 주부, 어린이, 노인교실을 운영하면서 한글반부터 한문, 영어, 꽃꽂이, 피아노 다양한 강좌를 열었어요. 그런 과정이 모태가 되어 2006년 한국평생교육진흥원 공모사업으로 성인문해학교기관으로 살구평생학교가 되었어요.
2015년부터는 성인들을 위한 초등학력 인정과정도 해요.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음악, 미술 다 있어요. 1, 2, 3단계를 마치고 자격이 되면 교육감이 주는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죠. 저도 2단계 ‘배움의 나무’ 과정 교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살구평생학교 학력 인정과정에는 어떤 분들이 몇 명이나 오시나요?
30여 분 정도 돼요. 이주 노동자들이나 결혼해서 우리나라로 온 젊은 분들도 가끔 오시는데, 그분들은 적응을 잘 못 하시고 6, 70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에요.
어르신들이나 저나 3년 공부하면 졸업한다고 처음에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런데 어르신들에게는 중등과정이 만만치 않아요. 초등과정과는 학습량이나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예요. 구청에 건의했더니 징검다리 같은 중학교 예비과정이 생겼어요. 초등과정을 마친 어르신들은 예비과정을 다니시면서 우리 학교도 나오세요. 그래서 초등학력 인정과정은 3년으로는 안 된다, 적어도 4, 5년은 해야 한다고 교육지원청에 계속 건의하고 있어요.
중등학력 인정과정이 우리 구에도 있나요?
우리 구에도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없어요. 경일학교가 있을 때는 거기 다니시면서 평생학교로 숙제하러 오는 분도 계셨어요. 그래서 중등과정 어르신 공부를 돕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신길동 ‘서현학교’까지 가야 해요. 차비도 들고, 어르신들은 오고 가기도 버거우시죠. 살구평생학교를 발전시켜 중등과정까지 해보면 어떨까 하는 고민은 있어요. 그런데 중등과정은 각 과목마다 선생님도, 교실도 따로 있어야 해요. 교무실도 따로 있어야 하고요. 그런저런 생각에 밤에 잠이 안 와요. ‘지금 이곳도 재개발로 쫓겨날까 말까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하면서요.
살구평생학교 학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문해교실에 몇 년 나오시던 분인데, 졸업은 못 하셨어요. 오실 때마다 뭘 그렇게 해오셔서 같이 먹고 그랬어요. 그런데 갑자기 안 오셔서 제가 도울 게 있을까 해서 댁으로 찾아갔어요. 군대에 가서 식물인간이 돼 돌아온 아들을 돌보고 계셨어요. 새벽 4시부터 목욕시키고, 음식 만들어 먹이고. 그 아들이 누워서만 지낸 게 3, 40년 가깝게 됐는데, 욕창 한 군데 생기지 않았대요. 그분에게 방문수업을 하며 조금이나마 희망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게 기쁘고 뿌듯해요. 아들을 보살피며 열심히 사시는 그분 모습을 등대처럼 늘 제 마음에 담고 있어요.
오랫동안 살구여성회에 관여하며 다양한 활동들을 해오셨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한두 개가 아니지만 2003년도에 금천구 지도 만들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자청해서 한 게 ‘금천구에도 미술관이 있어요’예요. 동네에 큰 빌딩이 지어지면 미술작품도 하나씩 생겨요. 미술관 하면 과천 현대미술관이나 덕수궁처럼 멀리 있는 것만 생각하는데, 우리 동네에서도 얼마든지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그 일을 했어요. 그때 카메라를 들고 금천구 골목골목을 다 돌아다녔어요. 그러면서 제가 금천구 사람이 됐죠.
반짝이던 순간 – 그게 하나라면 서운해요
‘살구여성회가 가장 반짝이던’ 순간, 전성기는 언제라고 생각하세요?
살구평생학교를 만들었을 때요. 그전에는 한 공간에서 밥집도 하고 살구여성교실도 하고, 아이들 교육도 했어요. 그러다 성인문해학교를 하자고 해서 공모사업에 지원했는데, 금천구에서 처음으로 선정됐어요. 그래서 교수님이 지원해주신 자금으로 지금 무지개 상가 건물에 사무실과 교실을 얻어 학교를 만들었어요. 제금난다고 하죠?
‘아, 우리도 학교가 있다’ 얼마나 좋아요. 행복하고. 그리고 교수님과 금천구 놀이터와 공동화장실 전수조사를 해서 구청에서 고치게 하고, 쉬는 토요일에 놀이터 문화학교를 했어요. 그때 놀이터 문화학교에 함께 하셨던 선생님들은 지금도 교육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죠.
살구여성회가 선생님께 갖는 의미를 비유로 표현한다면요?
아픈 손가락? 늘 정말 사랑하고 애정이 많은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으니까. ‘아, 내가 왜 이렇게밖에 못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쉬움은 많고. 혼자 가슴앓이를 많이 해요.
지금은 살구여성회에서 활동을 안 하시지만 지금도 같이 일하면 좋겠다 싶은 분이 계신가요?
공영옥 선생님이라고 지금은 베트남에 계세요. 영어를 가르치셨고, 회장을 맡아서 열심히 하셨어요. 그분은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시고, 아주 열정적이셨어요. 그 선생님이 오시면, 다시 손을 맞잡고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이디어도 의욕도 많으신데, ‘이런 걸 꼭 해보고 싶다’ 하면서도 여건이 안 돼서 아직 해보지 못한 일이 있나요?
음, 하지 못한 건 없어요. 날개를 활짝 펴지 못한 게 많아서 그렇지. 하하. 처음 금천구에 왔을 때, 골목 계단이나 놀이터에서 잠자는 아이들, 열쇠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이 만났어요. ‘아이들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집에 데려다 재우고, 재우기만 해서 뭣 하니까 책도 읽어주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그러면서 새움공부방을 시작해서 몇 년 전까지 했어요. 그때만 해도 그런 공부방은 금천구에서 제가 처음 시도하는 거였어요. 새터교회에 탁아방이 있었고 어린이학교도 있었지만, 공부방으로는 처음이었으니 제 나름으로는 구상이 컸어요. 그래서 보육교사, 공부방 지도교사, 상담사 그런 자격도 따고 ‘내가 이 정도면 뭐 잘 하겠지’ 했죠. 하하, 나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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