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휴먼스오브금천-우영화 살구여성회 활동가 인터뷰
글쓴이 : 마을관리자 작성일 :20-12-09 11:45 조회 : 374회 댓글 : 0건본문
시민들이 행복한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1990년대 금천구에는 사회복지기관이 별로 없어서 한글, 한문, 영어 공부한다고 하면 한 기수에 수백 명이 오셨어요. 이분들의 사연, 목소리 하나하나가 슬프면서도 재미있고 소중했어요. 이분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겸허해졌죠.
어떻게 살까 고민하다
살구여성회에서 언제부터 어떻게 일을 하게 되었나요?
90년대 초반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풀뿌리 시민운동 단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저도 그런 시민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다 대학 은사님이셨던 김주숙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살구여성회 같은 조직이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지역사회복지론 수업 시간에 듣기도 했고, 관심이 있어 저도 그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1993년 대학을 졸업한 해 4월부터 2001년 6월까지 거의 9년 가까이 살구여성회에서 일을 했어요.
시민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은데, 살구여성회가 추구하는 것과 자신의 지향점이 맞았나요?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뭘 해보는 것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회복지학과 학술부에서 사회복지정책분과, 사회복지실천분과 이런 걸 만들고 각 정당 사회복지공약을 조사해서 친구들과 토론도 하고 비교 분석도 해보고, 공부방 같은 곳에 자원봉사도 다녔어요. 일반 시민들과 같이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막연하지만 ‘시민들이 행복한 사회가 되면 좋겠다, 나도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살구여성회가 저의 지향과 좀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 지역에 대해 잘 몰랐고, 나이도 어리다 보니 지역주민들의 삶의 애환도 공감하기가 힘들었죠.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일단은 먼저 활동하셨던 선생님을 보고 배우며 따라 했어요. 살구여성회는 ‘여성들의 성장과 주도적인 사회참여’라는 정체성이 있었어요. 지역주민들이 사회적 역량을 쌓을 수 있는 활동을 했는데, 저도 그 부분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1990년대 금천구에는 사회복지기관이 별로 없어서 한글, 한문, 영어 공부한다고 하면 한 기수에 수백 명이 오셨어요. 이분들의 사연, 목소리 하나하나가 슬프면서도 재미있고 소중했어요. 이분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겸허해졌죠.
그리고 그때 김주숙 교수님과 정외영 선생님이 계셨어요. 두 분은 주민들의 소리를 잘 들으시고, 항상 주민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일을 해나가셨어요. 저는 사회복지활동가는 지역사회 조직화의 중심이 아니라 지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분의 활동방식은 제가 배울 점이 참 많았어요.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과
살구여성회 일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제가 들어갔을 때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독일 아데나워재단의 프로젝트였는데, ‘3년 안에 지역 여성조직을 설립’하라는 거였어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단체가 살구여성회, 한국여성민우회 동북지회, 한국여성노동자회 여성복지회관 세 단체였지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기관이 여성사회교육원이었는데, 연간 1,500만 원 규모의 사업이었어요. 거의 20여 년 전이었으니까 상당한 금액이었죠. 한 사람 인건비, 임대료 일부, 교재 개발비, 교육비 같은 지역 여성조직을 건설하는데 필수적인 재정을 지원해줬어요. 그리고 여성사회교육원에서 월1회 정기회의를 하면서 사례공유와 성과관리 등 실질적 운영지원을 해주었죠.
이 프로젝트를 통해 살구여성회는 주민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만들었어요. 그전에는 사무국 중심으로 운영을 했는데, 그 프로젝트를 통해 실질적으로 운영위원회가 의사결정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 임송자, 유인숙, 김영숙, 노금숙 이런 선생님들이 중요한 리더셨어요.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면서 환경분과, 독서분과 이런 걸 만들었어요. 환경분과는 우리가 환경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기획해서 실행했어요. 지역복지분과는 재가사업 같은 것도 하고, 펀드도 따오고 그랬어요. 그분들이 의사결정을 하면, 저는 행정적 업무나 자원 동원에 관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아데나워재단 프로젝트가 3년이 지나면서 지원금액이 300만 원으로 줄어든 거예요. 그 당시 지역조직에 수익이 뭐가 있겠어요? 그래서 운영위원회에서 그 문제를 논의했죠. 근데 정말 감동적인 게 뭐냐면 이걸 어떻게 극복할까 논의를 했더니 운영위원인 여성교실 선생님들이 강사비를 안 받겠다고 하신 거예요. 선생님들은 한글, 한문 일주일에 두 번씩 한 달에 여덟 번 수업하고 10만 원을 받으셨어요. 그분들이 애쓰시는 것에 비하면 큰돈도 아니었는데, 그걸 안 받겠다고 하시니 해결의 물꼬가 터지는 거예요. 그때부터 또 다른 수익사업을 찾고 그러면서 고비를 넘기고, 사업이 확장될 수 있었죠.
살구여성회 일을 하면서 좋은 일도 어려운 일도 참 많았을 것 같아요.
제일 기억에 남고 좋았던 건 선생님들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했던 경험이죠. 선생님들이 직접 한글, 한문 교재도 만들고, 중앙에 가서 발표도 하시고, 그런 것 자체가 모두 성과잖아요. 제가 가진 지향이 결실을 맺은 것 같아 좋았죠.
이후에 지역아동센터 운영, 무료 급식소 운영 등 사업을 넓혀가면서 포럼, 주부대학 같은 것을 했어요. 살구여성회 활동은 지역주민들이 직접 결정하고 운영하는 면에서 제가 봤을 때 모범적인 사례였죠. 한국여성개발원 같은 곳에서도 사례연구를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죠. 재미있었어요.
물론 힘들 때도 있었어요. 살구여성회가 중앙조직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서 다 잘해야 해요. 그때 여성사회교육원이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한국여성민우회나 한국여성노동자회 처럼 함께 논의할 중앙이 없어서 외롭고 힘들었어요.
살구여성회 활동을 돌아볼 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지역주민인 선생님들이 살구여성회의 가치와 지향을 더 튼튼하게 하고 차세대 지도력을 양성하며 성장했어야 했는데 참 어려웠어요. 그것을 이루기에 당시 제 리더십이 좀 부족했던 것이 아쉬웠죠.
변화를 만들어가는 힘
살구여성회 활동이 현재의 선생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지금 자원봉사센터에서 일을 하는데, 살구여성회에서 했었던 일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자원봉사센터는 자원봉사라는 공익활동에 시민들이 효과적으로 참여해서 사회변화를 만들 수 있게 지원하는 기관인데, 그때의 경험이나 노하우가 지금 여기에서 일할 때도 근간이 되죠.
자원봉사센터에서 만나는 분들은 이념과 계층이 다양한 시민들이에요.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의 힘을 느낄 때 정말 보람 있고 행복하죠.
행복한 사회가 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행복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행복하다고 하는 건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결정한 것을 책임지는 사회라고 할까요? 그리고 다양한 생각이 수용되는 사회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얘기를 서로 할 수 있고, 들어주고,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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