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세월호 롤링페이퍼-30대ⓐ] “아직도 가슴 먹먹…잊으면 제2 세월호 일어나”

관련이슈 스토리 세계 ,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

입력 : 2018-04-10 13:20:00 수정 : 2018-04-09 23:33:4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세월호 4년, 슬픔에서 기억으로②]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둘째 딸 유예은 양을 잃은 아버지 유경근씨는 언젠가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한 추모 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습니다.

“저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잊혀지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잊혀지고 우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가장 큰 위로는 잊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 그건 기억하는 것이요 기록하는 것일 겁니다. 1년 뒤에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2년 뒤, 3년 뒤, 10년 뒤, 100년 뒤에도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록하는 길이라 저희는 믿습니다.

세계일보는 이에 세월호 4년을 맞아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세월호 이야기를 최대한 채록하거나 인터뷰해 공유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지지를 부탁합니다.

*자신만이 기억하는 세월호 이야기나 기억, 관련 자료가 있다면 세계일보로 사연이나 자료를 보내주십시오.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독자 모두와 공유하겠습니다. 보내실 이메일은 kimgija@segye.com 또는 homospiritus1969@gmail.com, 전화 번호 02-2000-1181.

◆“아무 것도 못해...더이상 방관않을 터”

서울시 금천구 마을공동체지원센터 팀원 김인주(30)=“2014년 4월 16일, 나는 대학교 행정 사무원이었다. 여느 날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원생 조교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실시간 속보와 조교들의 걱정에 잠시 관심을 뒀지만, 모두 구조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에 집중했다. 몇 시간이 지나 복도 앞 TV를 보고 나서야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렸다. 그 순간 아등바등 매달렸던 잡무가 차가운 비현실로, 브라운관 안에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던 숫자가 더 차가운 현실로 바뀌었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는 것 말고는 오후 일정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캔맥주를 사 들고 내 방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뒤집어져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미안한 마음을 간신히 캔맥주로 억눌렀다. 사실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4년이라고 하는 이 무거움의 시간을 통해 ‘세월호’가 알려준 것이 있다면, 지금껏 우리 사회는 구조를 기다리지 말고 알아서 탈출해야만 운 좋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는 차가운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갇혀 있었던 과거와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돈과 권력을 향해 탈출하는 게 마치 삶의 의지를 따르는 미덕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세뇌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고라며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우리에게 진정한 물음을 던져주기도 한다. 우리의 아픔은 정녕 천재(天災) 때문인지. 다행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아직 갇혀있는 사람들도 이 아픔에 자연스레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인지. ‘구조’할 방법 같은 건 없으니 나라도 살아야 한다며 발버둥을 쳐야 하는지. 아니라고 믿는다. 더는 방관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4년이라고 하는, 입에 담는 것조차 버거운 이 무거움의 시간을 통해서야 그것이 시간의 무게만큼 마음 위에 얹어진 이 죄책감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되뇐다. 그때 손잡아주지 못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지금껏 고생했다며 그 사람들이 되려 날 위로해 줄 때, 터져 나오는 울음을 한사코 부여잡으며 ‘미안하다’고 또다시 사죄하고 있지 않을까.”

◆“처음 큰 사고 상상 못해...사람 소중함 깨달아”

회사원 김정현(30)=“세월호가 그렇게 큰 배인지 몰라서 이렇게 큰 사고가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날 당일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처음 딱 듣자마자 그냥 또 무슨 사고가 하나 일어났나보다 하고 솔직히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던 것 같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기사화되고 많은 학생과 많은 사람이 배 안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심각한 사고라는 것을 인지했다. 세월호 참사는 나에게 사회에 무관심하지 말고 또한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면서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세월호 사고를 되짚어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늦은 대처에도 문제가 있지만 늦은 대처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박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측근들의 일처리에도 문제가 있었다. 어떤 조직에서든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잘 마련해둬야 한다.”

◆“아직도 가슴 먹먹...세월호 잊지 말아야”

단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안지영(31)=“당시 대학 조교였던 나는 여느 때와 똑같이 출근준비를 하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속보가 들려왔다.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복됐지만 전원 구조됐다는 소식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학과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속보의 내용이 계속 바뀌고 있었다. 전원 구조라는 오보. 사무실에 앉아 바로 인터넷으로 실시간 뉴스를 켰다. 그때부터는 멍하니 계속 뉴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모니터만 계속 바라보며 믿지도 않는 신을 계속 찾은 것 같다. SNS에서는 계속해 안타까움, 분노, 슬픔의 글이 올라왔다. 안산에 사는 지인 중 단원고 아이들의 학원 선생이 있었다. 그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기 제자들의 이름을 적으며 제발 살아만 있어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배가 가라앉는 것을 모니터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안도가 불안으로, 불안이 슬픔으로, 슬픔이 분노로, 그렇게 그날 하루, 부정적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직도 세월호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작은 술집에서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세월호에 갇혀 이 세상을 떠나버린 아이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또 꺼이꺼이 운다. 생존자의 인터뷰, 유가족 인터뷰를 볼 때면 계속 눈물이 흐르게 된다. 생존자, 유가족들의 증언을 담은 책을 겨우 겨우 읽어냈다. 보다가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먹먹해져 다음 장으로 넘기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세월호는 아픔이고 분노였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부정부패, 안전불감, 도덕적 해이가 이 하나의 비극에 총집합 돼있다. 정부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시민들의, 아이들의 목숨을 사라질 때, 정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세월호 이후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적폐청산은 사실상 4년 전 그때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누군가가 힘을 잃자 세월호가 올라왔다. 세상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었다. 세월호는 아직도 사람들, 최소한 내 가슴속에는 슬픔과 분노로 남아있다. 아직도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고,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나는 세월호 분향소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모든 것이 해결되면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팔에 채워진 노란 팔찌와 내 가슴에 채워진 노란 리본을 아침마다 다시 바라본다. 기억해야 하기에.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절대 그들을, 이 비극을 잊지 않아야 앞으로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테니까. 이 비극을 몇몇 사람들은 갈등과 분쟁으로 이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언제까지 죽은 사람들 때문에 산 사람이 피해를 봐야하냐’며 갈등을 조장한다. 하지만 사람이 ‘같이’ 사는 곳이다. 사회적 비극은 ‘같이’ 아파하고, ‘같이’ 분노하며, ‘같이’ 해결하고, ‘같이’ 극복해야한다. 갈등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갈등을 조정해야한다. 특히 그들이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안전에 대한 불감증은 여전하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정부에서 더 이상 그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적극적 대처를 내놓고 있다. 정부에서 대통령이, 장관이 피해자와 유가족을 직접 위로하고 있다. 세상이 조금씩 더디지만 바뀌고 있다. 제도와 사회적 인식이 같이 바뀌어야 한다.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로 같이 사는 사회에서 안전은 ‘나 정도는 뭐’가 아니라 ‘나부터’여야 한다. 제도가 이것을 같이 뒷받침해야 한다. 안전지침을 어기면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들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고 ‘우리의 일’이다. 우리는 같이 살아가야한다. 세월호를 잊지말고 기억하며 다시금 같이 살아가야한다.”

◆“잊으면 제2, 3 세월호 일어날 수 있어”

웹소설 작가 이상아(31)=“사고 당시 한 신문사에서 교정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신문사에 출근해서야 소식을 접했다. 전원이 구조됐다는 자막이 신문사의 커다란 TV 화면에 당당하게 떠올랐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오보임이 밝혀지면서 몹시 큰 충격을 받았다. 참사 약 한 달 후 홀로 서울 광화문의 합동 분양소에 가서 흰 국화를 두고 왔다. 추모 행렬은 길었고 초여름의 햇빛은 따가웠다. 그 후로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히 문인(文人)들은 세월호 관련 글을 계간지에 실었다. 내가 외면했던 사회의 갖가지 문제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그 중에서도 박민규 작가의 ‘눈먼 자들의 국가’, 지도교수인 방현석 작가의 ‘세월’이란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쪽에서는 ‘노란 물결’을 추모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비난을 쏟아냈다. 누군가는 유족들을 끝까지 지키려 했고 누군가는 유족들이 돈에 눈이 멀었다 욕하거나 그들이 지겹다고 했다. 그 사이 1번의 탄핵이 있었다. 정권이 바뀌었다. 충돌은 현재진행형이다. 아직도 혼란스럽다. 세월호 사고는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이 참사를 가슴에 안고 살아갔으면 한다. 세월호가 잊혀지는 순간 언제든 제 2의, 제 3의 세월호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 세월호가 단순히 이용가치가 있는 수단 정도로 인식되지 않았으면 한다. 만약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성인이 돼 꿈을 펼치고 있을 단원고 아이들, 그들을 보살핀 교사들, 제주도로 귀향해 살고 있었을 다문화가족을 생각한다. 부디 좋은 곳에 갔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4년이 아니라 40년이 흘러도 내가 이 참사를 잊지 않고 추모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건호·김용출·김지연·이동수·하정호 기자 scoop3126@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